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원 전투 (문단 편집) === 8월 15일 === 일본군은 잡초와 벼를 베어 묶으며 큰 풀단을 만들어 쌓아두었는데 성안 사람들은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명 연합군은 전주에 있던 진우충이 2천여 명의 병력을 데리고 구원해 줄 것을 기다렸으나 진우충은 적이 너무 많다며 안 오고 있었다. 조선 측에서도 전라감사 황신이 변산반도로 피난가고 도사 김순영이 이끄는 소규모 조선군이 남원으로 가다 적성진에서 일본군에게 패해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양원은 동문에서 바라를 두어 차례 울리고 사람을 시켜 성 위에 올라가 두어 번 크게 소리치게 했다. 이를 듣고 일본군 군사 다섯 명이 동문 밖에 나와 전갈을 청하였다. 양원은 통역관을 시켜 몇 마디 주고받았고 일본군 군사들이 방암봉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몇 마디 말을 전했다. 그 자리에서 양원은 부하 두 사람을 내보내니 일본군 군사들이 그들을 데리고 방암봉으로 갔다. 이후 명군은 고니시 유키나와와 만나 대화를 하고 고니시는 명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저녁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일본군 군사 5명이 양원을 찾아오자 [[양원]]은 이들을 용성관 자기 처소에 들여 접견하였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일본군 장수들이 양원에게 성을 비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양원은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장수가 되어서 천하를 다니면서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전쟁은 없었다. 이제 정예한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와서 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물러나라고 하니 가소롭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군은 “천여 명 패잔병이 어찌 능히 백만의 군사를 당해내겠소.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무슨 은혜를 입었다고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응수했다고.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늦은 밤에 풀단으로 해자를 메우고 큰 풀단을 쌓기 시작했다. 큰 풀단이 쌓여 성벽을 타고 오를만한 높이가 되자 일본군은 풀단을 딛고 일제히 성벽 위로 올라가서 공격하기 시작했고 성안으로 넘어가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순식간에 성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조명 연합군은 주민들과 함께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낼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